순례길은 길 위에서 완성되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단순한 트레킹 코스가 아닙니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 걷다 만난 사람들 이야기에대해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는 제각기 다른 사연과 목적이 있으며, 그 다양성만큼이나 다양한 인연과 감정이 교차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사실 순례길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절경도, 완주 메달도 아닌 바로 ‘사람’입니다. 길 위에서 만나는 누군가와의 짧은 인사, 피곤한 오후에 건네받은 초콜릿 한 조각, 아무 말 없이 함께 걷는 한 시간의 침묵 속 교감… 이러한 작고도 진한 순간들이 바로 산티아고 순례길이 주는 선물입니다.
특히 이 길을 걷는 동안에는, 우리가 평소 일상 속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모두가 낯선 곳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스레 ‘나눔’과 ‘공감’이 기본값이 됩니다. 서로의 언어가 달라도, 삶의 배경이 다르더라도 이 길 위에서는 모두가 친구이고, 위로자이며, 동료가 됩니다.
이 글에서는 제가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했던 순례길 위의 따뜻한 이야기들을 몇 가지 나누어 보려 합니다. 언젠가 여러분도 이 길을 걷게 되신다면, 저처럼 잊지 못할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괜찮아, 네 속도대로 가면 돼" – 발에 물집이 터졌을 때 만난 프랑스 아주머니
산티아고 순례길 초반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심을 부립니다. 하루에 30km 넘게 걷고 싶고, 빠르게 도착하고 싶고, 체력이 남는 만큼 속도를 올리게 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하지만 4일째 되던 날, 양쪽 발 뒤꿈치에 큰 물집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더는 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었죠.
그날, 저는 중간에 멈춰 한 카페테리아 앞에 앉아 있었고, 우연히 지나가던 프랑스 출신의 60대 아주머니가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영어도 서툴고, 저는 프랑스어를 전혀 못했지만, 그녀는 조심스럽게 제 발을 살펴보더니, 자신의 가방에서 ‘컴스피드’라는 물집 방지 밴드를 꺼내 건넸습니다. 그러고는 환하게 웃으며, “괜찮아, 네 속도대로 가면 돼(Ça va, vas à ton rythme)”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순간, 이 길은 경쟁이 아닌 치유의 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그녀의 친절은 제가 이후 며칠 동안을 버티는 힘이 되었고, 제 순례길 전체를 따뜻하게 감싸는 위안이 되어 주었습니다.
함께 걷는 30일 – 국적은 다르지만 마음은 하나였던 친구들
산티아고 길에서는 종종 “카미노 패밀리(Camino Family)”라고 불리는 그룹이 만들어집니다. 일정이 비슷하고, 템포가 잘 맞는 사람들끼리 하루 이틀 같이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가족처럼 친해지게 되는 것이죠.
저는 한국, 독일, 캐나다, 브라질 출신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패밀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누가 먼저 함께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특정한 규칙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서로의 아침 인사를 기다리게 되었고, 점심시간에 서로를 찾게 되었고, 저녁에는 함께 와인을 마시며 그날의 걷기를 돌아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중 캐나다에서 온 제이미는 암 투병 후 회복을 기념하며 걷고 있었고, 독일인 안나는 워홀을 마친 후 삶의 방향을 고민하며 이 길을 선택했다고 했습니다. 모두의 이야기가 달랐지만, 공통점은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위로받았고, 각자의 고민을 나누며 삶의 조각을 조금씩 맞춰갔습니다.
이렇게 평생 만날 일 없었을 사람들이, 낯선 스페인 땅에서 만나, 함께 걷고,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함께 도착의 기쁨을 나눈다는 것이 참 신기하고도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짧지만 깊게 스쳐간 사람들 – 마주침의 소중함
순례길에는 장기 인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잠깐 스쳐 지나가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는 숙소에서 아침을 먹으며 어떤 스페인 청년과 15분 정도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1년에 한 번씩 산티아고 길을 걷는다고 했고, 그 이유는 “매번 나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 짧은 대화 속에서 그가 가진 삶의 태도, 자신을 마주하는 법, 자연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고스란히 전해졌고, 저는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를 보지 못했지만, 그 말은 아직도 제 일상 속에서 자주 떠오릅니다. “너무 바쁘게 살지 말고, 가끔은 너 자신을 다시 기억해 줘야 해.”
순례길에서는 때로는 말없이 스쳐간 누군가의 미소 하나, 건넨 물 한 병이 오래도록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그런 만남이 모여, 이 여정은 더없이 사람 냄새 나는 길이 됩니다.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사람’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사람들은 대체로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경치는 가물가물한데, 만난 사람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라요.” 저 역시 그렇습니다. 목적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하던 순간보다, 함께 울고 웃었던 사람들과의 짧은 인연이 훨씬 더 마음속 깊이 남아 있습니다.
이 길을 준비 중이시라면, 체력도 중요하고 장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마음을 열 준비’입니다. 그 마음 하나만 있으면, 분명히 뜻밖의 좋은 인연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걷는 동안 마주칠 누군가가 당신의 순례길을 특별하게 만들어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누군가의 순례길에 따뜻한 흔적을 남기게 될지도요.